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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자유공부법
우리가 사랑하는 자유(自由)라는 대상을 믿을 만한 분이 욕구를 분류한 방법을 빌어서 셋으로 구분해 보았다. ‘기본적 자유’와 ‘상대적 자유’ 그리고 ‘지나친 자유’가 그것이다. 그분의 처방전까지를 빌면 각각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보장’과 ‘절제’와 ‘규제’가 되겠다.
최근 책에서 읽은 것인데 유대교 교리에선 인간 전체를 10이라 할 때 그 구성비를 1:2:7로 본다 한다. 무조건 나를 싫어하는 비율이 1이라면 웬만하면 이해해 주는 2의 정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앞 숫자들의 뜻이다. 뒤의 7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라는 지적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앞의 1과 2는 좀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은 7은 하기에 따라서 상당히 바뀔 여지를 갖고 있는 층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글재주 없음을 알고 있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해석과 통하리라. 우선은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인간인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그것들이 ‘절제가 가능한’ 7에 해당하는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자신과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하길 기대해 보면서 말이다. 앞의 논리 전개들에 따르면 나머지 3의 사람들은 살기 급급하여 또는 세상을 자신들 멋대로 살려 해서 ‘절제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기에다.
뉴욕에 들러 자유를 논하며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리버티 섬을 방문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바람 상쾌하고 쨍하게 맑은 날 발치에 서서 올려다본 여신상은 어찌된 일인지 내게는 그 옷주름만으로도 압도하는 힘을 느끼게 하였다. 대좌를 제외하면 신상은 횃불까지 약 46미터이니 어림짐작으로도 옷주름은 10미터 이상일 터이다. 횃불과 독립선언서를 양손에 들어 온몸으로 자유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나에겐 오히려 힘의 강압이 느껴짐은 어찌된 일일까.
하지만 인간이란 강요에 눌려 무릎을 꿇을 때조차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누를수록 더욱 강렬하게 저항할 수도 있는 게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특성이다. 눈에 보이는 몸의 수준에서는 비록 전부가 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에 착각을 불러올 뿐이다.
모두가 잘 아시는 우화 ‘햇님과 바람’은 그러한 성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바람이 강제할수록 ‘인간’은 옷을 여미었고 햇님이 따사롭게 비추자 그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본 아름다운 영화 ‘브루클린’에서는 여신상의 모습이 빌딩숲 사이로 솟아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보통의 소개 화면은 출렁이는 해수면과 더불어 보이는 장면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3년 개통 당시 세계 최장의 다리였던 브루클린 브릿지가 화면에 슬쩍 스쳤던 듯한데 그 지역으로 접안(接岸)하며 바라본 풍경이라면 신상이 맨하탄 남쪽 빌딩들과 어울려 등장하는 장면이 당연하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던 브루클린이다. 이때만 해도 뉴욕에는 이미 뉴욕을 유명하게 만들던 건축물들이 다수 건설되어 있을 때여서 영화 속에 자연스레 등장하고 있다. 어떻든 브루클린 또한 엄연히 뉴욕의 일부이건만 ‘엠파이어 스테이트’라는 별명을 가진 뉴욕주로서는 맨하탄이 ‘황제’에 해당할 중심이기에 브루클린과의 사이를 흐르는 강의 이름은 ‘이스트 강’이다.
그러니까 브루클린에서 보자면 ‘동강’ 아닌 ‘서강’임에도 맨하탄의 위용을 넘볼 수 없어 이스트 강인 것이다. 허드슨 강처럼 예전의 중립적인 이름 ‘사운드 강’을 사용할 법도 하건만 오늘날 굳어진 이름은 이스트 강이다. 모르쇠 역지사지(易地思之) 세상의 이치란 게 그러하다.
그런데 요즘 지구촌 흐름을 보자면 자못 7에 해당하는 민초들이 주도하는 듯하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이 그러하고 어쩌면 주류로부터 ‘꼴통’으로 치부되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도 있을 미국이 그러하다. 한국의 4월 총선이 보여준 움직임도 거기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7할의 양으로 대세(大勢)를 과시할 수는 있어도 결국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다. 아무리 직접 민주주의를 부르대어도 현대의 특성상 대의(代議)를 가능케 할 뿐 권한의 위임 이상은 하기 어렵다. 어떻든 위대한 정치인을 등장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다는 점은 대단하다.
다만 국민 위한 지도자를 등장시키기 위해선 변할 수 있는 가능성 지닌 7할의 백성들이 각성(覺醒)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다시 말해 정치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임을 알아 투표에 나서는 일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선거에 나서기 전 어떤 자가 ‘제대로’ 된 자인지를 공부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공부 과정이란 의외로 간단한데 인문적 기본 소양(素養)을 쌓는 가운데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그 핵심이다.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영국의 젊은 세대들의 분노처럼 역풍을 불러 올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격이 심하게 부족한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추세 역시 자유를 공부로 연결하는 노력의 부족이 불러온 사태라고 판단된다.
운전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뿐 모두가 선장 되겠다고 나서면 배는 산으로 가고 만다. 국민들이 할 일은 저마다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사회를 맑힐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요컨대 진정한 자유인을 가려낼 잣대가 될 그것을 나는 ‘자유 공부법’이라 명명(命名)한다.
예로부터 국운은 결국 하늘에 달렸다는 체념적 발언이 있다. 그런데 또 백성은 하늘이라는 말이 있어 국민된 자의 해야 할 바를 일깨운다. 내가 나름의 정성으로 붓을 놀려 독자분들의 안전(眼前)을 어지럽히는 행위 또한 어쩌면 자유 공부의 일환(一環)이기도 하겠다.
문명 이기(利器) 덕분에 며칠새 뉴욕을 휘돌던 내가 프놈펜 왕립대학 교정을 거닐고 있다. 정문을 바라고 앉은 위대했던 정치가 자야바르만 7세 흉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7할의 백성들이 자신들 자유를 바른 공부로 연결지어갈 지혜의 묘법(妙法)을 꿈꾸고 있지는 않을까./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