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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말과 도로
한 나라의 수도(首都)로서 프놈펜과 서울을 견주어 곰곰 짚어본다. 최근 들어 건축 붐을 타고 프놈펜에는 무섭게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자동차가 급증하며 고급 외제 차들이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은 오히려 서울보다도 더하다. 그런데 특별한 규제가 없어 노후 차량이 많아지니 대기 오염이 심각하다. 도시 발전 계획도 부실한 듯 거닐 만한 길이 거의 없는 상황은 심각하게 아쉬운 점이다.
서울 거리를 걷노라면 간혹 부딪히는 황당한 종교인들이 없다는 건 장점일 수 있겠다. 우선 느닷없이 도(道)가 궁금하냐 물으며 사람을 당혹시키는 도사들이 없다. 그런가 하면 불신자는 지옥 간다며 대놓고 겁박(劫迫)하여 동일 종교 가진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니 ‘정신의 자유가 행복’이라는 공식을 따른다면 섣불리 서울이 낫다 말하기 어렵다. 정신이나 마음이라는 영역은 스펙 또는 재력이라는 것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서울의 오늘이 미소 짓는 프놈펜에게서 주목할 점은 어쩌면 이런 부분은 아닐까.
신년 초하루를 멋쩍게 보내기 서운해 바쁜 아내와 모처럼 이온몰 원단(元旦) 데이트를 했다. 일본이 지은 최신 쇼핑몰인 이온몰은 4D 개봉관도 갖추고 있어서 가끔 들르기에 안성맞춤이다. 아직 한국에서도 개봉되지 않은 ‘Ip Man3[葉問3]’을 내친 김에 또 4D로 관람하였다.
이번에는 캄보디아어 더빙에 영어 자막이 나와서 지난번보다는 조금 이해하기 수월하였다. 그러나 내 영어가 본디 ‘서바이벌 잉글리시’라서 이해 정도는 ‘도찐개찐’이었다. 그래도 ‘도’보다는 ‘개’가 초짜 수준에서는 또렷하게 나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영화 말미 영춘권의 명인인 두 주인공의 대결 장면은 통쾌함이 듬뿍 담겨 있다. 결투를 유도했던 도전자 격의 인물은 실력차를 느끼자 졌음을 인정한다. 자신이 최고라며 웅장하게 내걸었던 현판을 장대로 갈라 패배했음을 받아들이는 신은 승복(承服)의 감동을 뭉클 안겨준다.
캄보디아 불교를 소승이라 부르며 짐짓 대승을 대표한다는 한국 불교는 대체로 선불교를 표방한다. 한국 선불교 하면 많은 분들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든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떠올린다. 말로는 도를 표현할 길이 없고 오히려 말길이 끊어져야 득도(得道)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짙게 배어있는 말들이다.
지식의 불요(不要)를 강조하는 위의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나타낸 고유어가 ‘알음알이’란 단어이다. 그러니까 조계종 식으로 말하면 선방(禪房)에는 가본 적 없이 배움으로만 불교를 알았다는 뜻이 된다. 말이나 지식을 몹시 못마땅해 하는 자세가 거칠게 드러나 있다 하겠다.
그런데 ‘알음알이를 버리라’는 것 또한 ‘말로 되어 있음’은 어쩔 것인가. 결국 ‘말로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음을 경계한 것이지 말 자체를 부정하자는 건 아니라는 게 요점이다. 인간에게서 언어를 빼버린다면 그것은 곧 동물(動物)이라고 나는 믿는다.
조선조 오백년사를 한마디로 당쟁(黨爭)의 역사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앞서간 논쟁(論爭)의 모범이라 내세우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러자면 논리에서 밀릴 때 승복하는 전통 갖춰야 당쟁은 논쟁 되어 자부심이 될 수 있다.
넘치는 학력[스펙]에 턱없이 부족한 인성의 패륜들을 최근의 교사 폭행 영상에서 뼈아프게 목격한다. 영상을 보면 이들이 내뱉은 소음들은 형식이 말일 뿐 말이 아니다. 어쩌면 이런 지껄임의 배경지식들이야말로 ‘알음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냐 기독교냐 따지는 종교를 넘어서서 먼저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기본’의 교육이 필요한데 내가 보는 기본 교육의 개념은 ‘인간의 도리가 실천으로 나오도록 언어를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바로 오늘 한국인 모두가 이것의 절실함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경제 강국 대한민국’은 어쩌면 순식간에 사상누각(沙上樓閣)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기업이나 단체들의 책임자들을 만나 보면 오늘의 한국 청년들이 의외로 무지함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인 평균을 훌쩍 능가하는 화려한 스펙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교단의 경험에 비추면 오로지 학과 성적만을 능사로 키운 당연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걱정할 적기(適期)라고 본다.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엄청난 스펙 때문에 오히려 취직의 무수한 기회들을 날리고 있다. 게다가 스펙만을 쌓느라 세계인들의 상식에 비추어 현저하게 무딘 국제감각과 초라한 역사인식과 부족한 인류애를 지닌 경우들이 많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미숙한 점들을 통절하게 반성하는 자세가 사무치게 선행되어야 하리라.
말이 도의 길[道路]을 끊는다는 선불교의 통찰은 날카로운 진리일 수 있음을 믿는다. 요즘의 한국을 보자면 그만큼 있어서는 안 될 말들이 횡행(橫行)하고 있음 또한 너무나도 분명한 것 같다. 상대의 가슴에 칼이 되어 남는 말, 화려하게 추켜세우며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말, 화합보다는 갈라놓기에 정력을 낭비하는 말, 아무에게도 도움 되지 않아 허공으로 흩어지는 쓸데없는 말 등은 부정할 수 없는 도로(徒勞)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심스레 말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한다. 아니 그러기에 더욱 헛수고인 허언(虛言)들을 거둬내고 인문학적 성찰 통해 깨달음으로 열매 맺을 참말들을 가려 뱉어야 한다. 언어도단은 진리의 일면이지만 말이란 도의 길을 찾아가는 인간만의 유일한 도구(道具)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한유일(교사 ,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