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인생(人生), 묘생(猫生)

기사입력 : 2015년 12월 16일

동기간 중에 돌림자를 따라 아들이름을 ‘두환’이로 지은 덕에 제5공화국 들어 깨소금 재미를 보신 분이 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로 명절 귀향길처럼 사람 많은 곳에서 말썽부리기 일쑤였는데, “두환아, 짜슥아!” 한마디면 주변이 평정됐다는 것이다. 남편은 지금 기르는 고양이 이름에 마누라 이름을 따서 붙였다. 나에게 퉁명스레 내지를 때와 달리 어찌나 다정하게 부르고 살갑게 어르는지 ‘고양이만도 못한 신세’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존재감 비하 구박을 즐기는 듯하다.

캄보디아에 흔한 쥐만큼 고양이도 많다. 게다가 대부분 미묘(美猫)다. 고양이계에서 수려하기로 유명한 샴고양이와 페르시아고양이를 교배한 버마고양이가 캄보디아에서 비롯되었다니. 고양이와 인류의 인연은 5천여 년 전 이집트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기 무덤에서 인간의 유골과 함께 고양이 뼈가 발굴되었다. 농사가 널리 보급된 신석기시대에 곡물을 보관하게 되면서 쥐가 늘자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으리라.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고양이는 다산과 풍요, 치유를 관장하는 바스테르 여신의 화신으로 숭배되어 고양이를 죽이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한국에 고양이가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시대 즈음이다. 쥐가 불교경전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양이를 들여왔다고 한다. 서적을 보호하기 위한 고양이라니, 지식이고 인격이고 돈이면 다 포장되는 곳으로 세계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이지만 예전엔 얼마나 고상했는가.

고양이는 인간과 대비되는 구석이 많다. 짝짓기만 해도 그렇다. 고양이의 짝짓기는 발정 난 암컷이 수컷을 부르는 신호로부터 시작된다. 아기 울음 같기도 하고 여인의 신음 같기도 하고 생명의 시원과 닿아있는 야성의 소리는 밤의 정적을 흩뜨려 놓기도 하지만 새끼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낳는다. 반면에 사람은 사랑은 숨어서 은밀하게 나누고(19금 영화에선 숨넘어갈 듯 요란한 커플도 등장하지만) 아이를 낳을 때는 주변이 떠나가라 울부짖는다. 명줄을 타고난 것들이 그렇듯이 고양이 삶이라고 고단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고양이들은 묘생(猫生)의 95%를 아무것도 안하는데 쓴다고 한다. 할 일없이 빈둥거리며 노닥거리는 데 죄의식을 느끼고 성공할수록 바빠지는 우리네 인생(人生)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고양이처럼 명당자리를 잘 찾는 동물이 있을까. 한 여름에는 서늘한 타일바닥에 몸을 최대한 밀착하여 눕는다. 요즘처럼 싸락한 날씨엔 영락없이 볕 좋은 소파 위가 제 차지다. 따듯한 햇빛, 푹신한 소파, 실눈을 한 채 정물처럼 앉아있는 고양이, 높은 지성을 갖추지 않고도 신기하리만치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 수명 몇 곱절을 살고도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구별 못하고 이렇듯 어정쩡하게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고양이는 기껏해야 십 년을 사니 갓 낳아서부터 기른 고양이가 어느덧 늙어간다. 애묘인과는 거리가 멀어 다른 묘생엔 관심 없지만, 녀석을 보면 괜히 마음이 저릿하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