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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거절하는 캄보디아
서울에선 가을 깊어갈 시월의 마지막날이 할로윈 데이였던 모양이다. 가끔 들르는 카페에 가니 출입문과 안벽 등에 호박 스티커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휴일도 많거니와 세계인들의 축일은 오지랖 넓게도 빠뜨리지 않고 즐기는 분위기이다.
햇수로 삼 년째 머물며 보니 캄보디아에서는 신년 맞이만도 한 해 세 번이다. 서양력에 의한 1월 1일, 중국인들 영향력 반영된 중국설, 그리고 4월의 자신들 정초까지 말이다. 많이들 아시는 대로 중국설은 우리 설날과 동일한 날이다.
세계인의 즐거움에 이렇게나 개방적인 나라가 있을까. 활짝 열린 문호(門戶)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는 무수한 엔지오들의 천국이기도 한 캄보디아는 그러나 최근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입법을 강행한 바 있다. 얼핏 보면 주권국가의 정당한 권위를 드러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주체적인 거절이라기보다는 정권 담당자들이 이익만 취하고 듣기 싫은 소리는 통제하여 길들이려는 의도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우기가 끝나가는데 가뭄은 심각하여 해마다 11월 말 열리는 3대 명절의 하나인 물축제 본옴뚝이 전격 취소되었다. 국가적 재난인 가뭄으로 고통받는 국민들 걱정을 빌미로 삼은 총리의 고뇌의 결단이었다. 때마침 야당 부총재를 국회부의장직에서 끌어내린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두려워한 조치라는 말들도 있지만 저렇게나 국민 염려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지도자의 정성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크다. 허나 그것은 해석의 자유라 민주 국가에서는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취소 발표 뒤의 요 며칠간은 요란스런 비가 몇 차례나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장마처럼 거의 종일 내린 날도 있으니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째서 최고 지도자라는 분들은 국민의 가려운 곳을 알지 못해 헛다리를 긁는 일들이 항다반사(恒茶飯事)일까. 비단 나라뿐이랴. 어느 집단이든 우두머리가 되고 보면 그들은 구성원의 의사에 반하여 고집을 피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어인 연유(緣由)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독립기념일인 11월 9일 저녁 7시부터 약 30분간 예년처럼 왕궁 건너편 강변에선 화려한 불꽃이 솟았다. 밤이 무르익어 다음날 새벽이 되자 천둥과 번개를 거느린 폭우가 프놈펜 전역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렇게 가뭄 걱정을 덜어주고 있으니 지도자는 과연 자신 뜻 접고 백성들 신나는 축제를 되돌려줄 것인가.
코이카가 올해 지어준 안과병원 앙동에서 조금 북으로 떨어진 곳에 벙깍 호수가 있었다. 최근까지도 프놈펜의 지도에서 크게 표시되어 있던 곳이다. 아름다운 쉼의 공간이던 호수는 지금 말끔히 매립되어 도로가 닦이고 개발을 기다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새로 옮긴 대사관 부근의 숙소에서 내다보면 대형 건물을 짓는 공사장이 있다. 그런 대규모 건축물을 비롯해 프놈펜 전역에 크고 작은 공사판이 봇물을 이루는 요즘이다. 전문가가 아닌 나의 시각이지만 언젠가 한국을 휩쓸었던 난개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서두에도 적었듯 거침없는 문화 개방으로 세계의 문화가 급속하고도 무분별하게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풍문에 따르면 사회를 이끄는 소위 지도층은 돈만 된다면 모든 것을 허가하고 있다. 그러니 국민들이라도 정신차려야 하거늘 그저 즐겁기만 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듯 거리는 행복감으로 넘친다.
내가 여기서 문화 잠식(蠶食)을 걱정하는 걸 도가 넘는 국수주의적 태도라고 보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바야흐로 지구 마을의 시대에 여러 국가에 이권을 나눠준들 어떠하며 세계적 축제를 기념한들 어떠하리. 하지만 모두에게 환영받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은 자칫 정체성 상실의 무뇌아(無腦兒)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세계인들이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대회에 열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세계의 역사는 민족 단위의 국가를 중심으로 쓰여질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기에 국민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지 타인을 배타하려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거절이라는 행동은 단순히 남의 뜻을 무시하는 무례라고만 볼 수는 없다. 호의에 기초하는 엔지오의 지원이든 발톱을 감춘 국가적 원조든 덥썩덥썩 물기만 한다면 정상적인 국가라 하기 어렵다. 기본의 맷집을 갖추려면 개인이든 국가든 의존만 해서는 곤란하다.
내가 보기에 이 나라는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의존 성향이 심각해 보인다. 해법은 당연히 국민적 차원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국가적 수준의 자각(自覺)을 유도할 국민운동이 절실하고 그것을 선도(先導)할 지도적 인물도 나와야 한다.
좀 심하다 싶은 표현이지만 당해본 적잖은 교민들은 캄보디아인들이 외국인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하게 뜯어먹으려는 심리가 깔린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러한 국민 심리는 주변 강국에 끼어 생존만이 지상 목표였던 기나긴 역사를 보면 이해못할 바도 아니긴 하다. 어떻든 국가가 단위 되어 움직이는 현실에서 자원봉사라면 모르겠으되 경제의 영역에서 그런 심리 경향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한국인만 봉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리라.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이들의 미소는 많은 외국인들을 무장해제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좀 살아본 사람들은 그것을 가식의 미소라 부르며 싫어하는 분들이 꽤 많다. 웃음으로 얼버무려 상대를 발라먹는 경향을 졸업하고 자존(自存)을 헤치는 것이라면 돈이든 문화이든 멈출 줄도 아는 성숙한 인격 지닌, ‘거절하는 캄보디아’를 짐짓 기대해 본다. (한유일: 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