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진주혼식(眞珠婚式)

기사입력 : 2015년 11월 11일

그들은 대학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맞벌이를 하면서 얼마간 자금을 모은 후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은행 융자를 보태 조그맣게 자기사업을 시작한다. 부부가 원했던 일인 만큼 내핍 생활을 하며 열심히 꾸려갔으나 부채는 쉬 줄지 않는다. 집에 난방기구조차 없어, 몹시 추운 밤에는 키우던 고양이들을 껴안고 잔다. 은행 이자상환 날은 다가오고 더 이상 돈 구할 방도는 없고, 상심한 부부는 깊은 밤 무작정 길을 걷는다. 발부리에 구깃구깃한 돈뭉치가 걸린다. 거짓말처럼, 그들이 필요로 했던 금액이다. 만기를 하루 앞두고 그렇게 부도위기를 면했다. <상실의 시대> 작가 하루키 부부의 얘기다. 유명한 사람의 수난사에서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일말의 위안을 느낀다. 위기는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구나 하는.

사는 게 진전도 퇴보도 없이 답보상태를 못 벗어난다 싶던 어느 해, 우리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고국을 떠나왔다. 이방인처지에 겁 없이 자기사업을 강행한 후 갑자기 금융대란이 닥쳤을 때에는 허름한 나룻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상처뿐인 영광도 못 되고 상처뿐인 방어랄까. 남편 얼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다름 아닌 주름살이다. 결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모험이라지만 어느덧 칼자국처럼 깊어진 그 주름들은 적당히 해서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걸 곁에서 지켜봤으니. 부조리한 상황에서 허덕이고 나서야 깨달음이 오는 것을 보면, 역시 부부를 결속시키는 건 고난이 아닐까싶다. 좋은 시절에는 영원할 듯한 우정으로 넘쳐나지만 세상이 다 외면하는 궂은일 앞에서는 오로지 둘 뿐이라는 사실을, 서로에 대한 연민 외에 기댈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2016년, 병신년, 내년이 결혼 30주년이다. 일 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설레발을 치는 이유는 내년 이맘때쯤이면 프놈펜에 없을 듯싶어서다. 아무려면 귀한 진주혼식(眞珠婚式)에 이런 글 나부랭이나 주무르고 있겠는가. 마르께스의 말을 빌자면, 사회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내편에선 푼수 떤 기억 외에 별반 거든 일이 없지만 남편 덕에 지루함을 모르고 지냈다. 유일한 노후대책인 딸 아들, 수영장 하나 정도 들이킨 맥주, 삼천 편에 이르는 영화감상, 그리고 모래알 같은 이야기가 우리 결혼 30년의 결산이다. 무관심은 부부사이에 가장 큰 폭력이다. 인생이 지겨움 속에 매몰되지 않게 마음 써준 남편에게 감사한다.

SNS 풍문에 의하면 ‘남편은 일하는 반려동물’이라고 한다.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느라 거실이고 화장실이고 어질러 놓기도 한대나. <남편사용설명서>에 한 세대를 부대껴오며 터득한 요령하나를 보태자면, “잘했군, 잘했어”, 기를 살려주면서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오늘 이렇듯 남편을 과장해서 띄우는 이유도, 그러니까 앞으로 더 분발하라는…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