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가슴과 폭탄

기사입력 : 2015년 09월 22일

90년대쯤 세계 오지 사람들을 보여주는 어느 매체에 캄보디아 프러우족이 소개된 적이 있다. 국경의 고원지대 깊숙이 사는 프러우족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산다. 나이를 막론하고 엉덩이에 천 조각 하나만 두르고 다닐 뿐이다. 어쩌다 벌거숭이들 사이로 레이스 브래지어를 한 아낙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귀한 물건’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언제부턴가 그 귀한 물건이 보편화되면서 차츰 의복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곳이 유럽인의 관광코스로 이름이 나 요즘은 관광객이 몰릴 때만 옷을 벗는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꽁꽁 숨겨진 오지의 문화까지 샅샅이 끌어내 상품화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본주의 덕이다.

여자의 유방은 인류에게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다. 고형물인 파라핀을 주입해 가슴성형을 하던 시절,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어찌나 성형을 많이 했던지 서부영화 말 타는 신에서 여걸들의 봉긋한 가슴이 출렁이지 않아 감독이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방을 성적 ‧ 심미적으로 추구해왔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도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해왔다. 다른 포유류의 젖가슴은 수유기에만 커지는데 비해 여자사람의 가슴은 젖의 분비와 상관없는 지방질로 이루어져있어 늘 풍만하게 유지된다는 점을 근거로, 인류학자들이 이색적인 주장을 편 바 있다. 유인원에서 직립보행 하는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수컷을 유혹하던 엉덩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엉덩이 모양으로 발달시킨 게 여성의 젖가슴이라는 것이다. 하체의 엉덩이에 있던 성적인 상징이 상체의 가슴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여자의 젖가슴은 사교적 ‧ 유대적 기능을 위해 발달했다는 이론이다.

얼마 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상의를 벗고 자전거를 타던 세 자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슴부위를 가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녀들은 이 일로 현지 경찰을 고발하고 여성에게도 벗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는 1996년 통과된 법에 의해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개정된 한국의 경범죄처벌법에 따르면,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온타리오 주는 ‘드러내는’ 자유에, 우리나라는 ‘보고 싶지 않은’ 자유에 법의 초점을 맞춘 셈이다. 풍성하게 털이 달린 동물들과 달리 사람의 알몸은 한없이 무력하고 초라해 보인다. 인류 최초의 지혜는 나신에 대한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더구나 진화목적에 부합하게 유혹적인 가슴을 지니는 시기는 인생에서 순간에 불과하다. (남자사람 가슴은 볼거리가 부족하니 논외로 치고) 캐나다에서 수백 명의 남녀가 “가슴이지 폭탄이 아니다. 침착하라”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상상컨대 다큐멘터리 영상의 나체촌 풍경이 그렇듯이, 시쳇말로 ‘폭탄’성 가슴이 훨씬 많으리라. 보고 싶지 않은 자유에 한 표!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