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요섹남 요섹녀

기사입력 : 2015년 09월 18일

갓 얼음과자 맛을 알게 된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계속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자신이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쑥쑥 줄어드는 게 서러웠기 때문이란다. 어떤 분이 들려준 아들의 유아기 에피소드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위(胃)을 가지고 싸운다’고 했다. 사흘 굶은 병사들에게 사기나 애국심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미일 테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 출생)와 D(death 죽음)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고 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하는 선택 중 태반은 <무엇으로 위장을 채울 것인가> 아니겠는가. 발자크는 그의 저서 <고리오 영감>에 인간의 행복이란 발바닥에서 후두부사이에 있을 뿐이라고 썼다. 그 중 입에서 위장에 이르는 길만큼 간단없이 욕망하는 신체부위가 있을까. 믿을만한 통계에 의하면, 식사대접 횟수와 승진 속도는 비례한다. ‘사람의 마음과 통하는 길은 위(胃)에 있다’는 현자의 말씀이 증명된 셈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탄탄한 토대는 역시 음식을 나누는데 있으리라.

오늘날 조리법, 세팅법, 식탁매너에 이르기까지 식문화를 끌어올린 곳으로 프랑스를 꼽는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으로 도약했던 시기는 “짐이 곧 국가다”로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 때 절정을 이룬 절대왕정 시대다. 타고난 미식가였던 왕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궁중요리사들이 얼마나 살얼음을 기었던지, 연회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요리사가 자살할 지경이었다. 밥상을 자주 뒤엎는 집안이 분위기는 흉흉하지만 음식 맛은 일품인 가문이 많다던 옛 어른들의 귀띔과 일맥상통한다. 음식 맛의 비결은 대부분 솜씨와 정성에서 비롯되지만 국가나 가정이나 불평과 불만이 있는 곳에 창조와 개혁이 따르게 마련 아니겠는가.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에 이어 요섹남(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자)이 대세다. 건장한 남자가 주방에서 곰살스레 조리하는 모습이 묘하게 여심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중장비를 운전하는 가냘픈 미인’에 비견되는 ‘의외성’ 때문일까. 각별하게 타고난 미각 못지않게 남의 위장을 대접할 수 있는 빼어난 요리 재능 또한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 농산물, 해산물, 열대과일뿐만 아니라 상품화 되지 않은 밀림의 야생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캄보디아만큼 풍부한 식재료를 가진 나라도 드물 테지만, 나 같이 요리젬병인 사람에겐 그림의 떡이다. “집에 놀러 와요, 밥 한번 먹읍시다.” 살면서 가장 많이 날린 공수표다. 워낙 한 자리에 퍼질러 앉아 수다 떨기를 좋아하다보니 덜컥 집으로 청하기를 잘하는데 늘 요리가 문제다. 프랑스 전 대통령 퐁피두의 중산층기준에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좀체 드물어서 탈이다. 미인소박은 있어도(그러니 남편은 결코 걱정할 일이 아니라지만) 요섹녀 소박은 없다는데, 나만의 메뉴 개발이 간절하다.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