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둥지

기사입력 : 2015년 09월 18일

가끔 죽음이 삶에 인접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잡다한 선택의 문제가 확실해 진다. 성공과 실패 따위 집착했던 것들이 사소해지고 가장 소중한 요소만 남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모질어야 차지한다는 뻔뻔함이 대세인 현실주의 시대라 사후의 행로에 대해서는 회의하기 마련이다. 자기 확신의 화신이었던 스티브 잡스도 죽음은 ‘딸깍’ 누르면 꺼져버리는 전원스위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믿고 싶다”고 했다지 않던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가 배경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한 귀부인이 수도원의 장로를 찾아가 오랜 번민을 토로한다. “어떻게 하면 내세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자로 추앙받는 조시마 장로는 내세를 증명할 방도는 없지만 믿음은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실천적인 사랑을 부단히 베풂으로서 그 사랑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자기 영혼이 불멸하리라는 확신에 이른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테마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진부한 결론이지만, ‘기브 앤 테이크’에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거의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겠으나 에스키모인에게 전해지던 고려장 사랑방식과 닮았다. 더 이상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늙게 되면 자손에게 곰이 자주 다니는 계곡에 버려달라고 간청한다. 곰에게 기꺼이 잡아먹힘으로써 그 곰을 잡아먹을 후손, 그 후손의 후손으로 이어질 피와 살 속에 영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프놈펜처럼 작은 교민사회의 부고는 많은 사유거리를 안겨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기처지에서 생각하게 되는지라 연고지를 떠나 해외 살이 하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아 더할 터이다. 아담한 식당을 운영하던 교민 한 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 캄보디아 전체 한인수가 6천여 명 정도라는데, 이곳 프놈펜은 그 절반이나 되려나? 교민잡지 광고 중 태반이 음식점 광고다. 인구 천 명 당 1.8개라는 미국의 식당통계에 비해 프놈펜은 어림잡아 10배에 이르니, 그만큼 자리 잡기까지 고초가 짐작이 간다.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받던 중에도 몸을 조금이나마 추스를 수 있게 될 때마다 프놈펜에 가고 싶어 했다는 측근의 말씀이고 보면, 캄보디아를 고국보다 사랑하신 모양이다. 들고 낢이 심한 풍토에서 그렇듯이, 친밀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꽤나 소탈한 인상을 받았다. 몇 해 전 위암수술을 한 후, “살아생전에 이렇게 착하게 산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뒤집어보면 내내 착하지 못한 인생이었다는 고백인 셈인데, 그것은 선량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예전 그대로 이어지는 <둥지>라는 상호처럼 그분도 평생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아 헤맸겠지만, 이 세상의 ‘둥지’란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이곳에서 행한 그간의 사랑이 결실에 결실을 이어가게 될 테지만.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