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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 칼럼] 서울 나들이
서울은 갈 때마다 조금씩 더 편리해지는 듯하다. 카드 하나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대중교통망도 그렇고 도로를 건너는 육교에도 리프트가 설치돼있어 프놈펜 공항부터 남산기슭 친정붙이 현관에 이르기까지 캐리어 한번 들지 않고 도착했다. 고국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이제 무색하다.
건강검진을 핑계로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병원검사결과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아무리 용 써봐야 삼사십 년 밖에 못 산다는. 썰렁한 농담이지만, 유쾌한 저술가 마틴 가드너 같은 사람도 ‘우리는 모두 불가해한 사형선고를 받은 채, 한바탕 익살극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으니 무리한 표현은 아니리라. 각자 형 집행날짜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 시한부인생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서울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빠 보였다. 치열한 취업경쟁을 뚫느라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청년층이나 문화센터니 복지관이니 저마다 어딘가에 적을 두고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러 다니는 장년층이나, 자유의지에 따른 활기찬 인상이 아니라 왠지 형기를 채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경리단길을 걷다 시내버스에 올라탔는데 3D 영화관인가 착각할 정도로 짙은 선글라스 일색이었다. 패션뿐만 아니라 성형, 화장, 독서, 영화, 운동, 요리, 여행을 망라한 개인생활까지 트렌드의 지배를 받아 ‘같은 감옥수’ 행렬을 보는 듯했다면 마음이 지나치게 꼬인 것일까.
오랜만에 여고동창 겸 대학동창을 만났다. 대학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도 있었으니 그동안 한 세대가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처음엔 서로 너무 변한 모습에 당황했으나 학창시절 얘기 몇 마디가 오가자 그 세월이 단숨에 극복되었다. 역시 순수한 시절에 만난 지기들이라 그런지 마치 학교연극무대에서 늙수그레하게 분장한 여대생들끼리 수다 떠는 기분이 들었다. 한 친구가 그 시절 나를 회상하며 이것저것 욕심도 많았고 언제나 남학생들에 둘러싸여있어 괘씸했다는 얘기를 했다.(비록 내가 이날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기주의자임에 분명하나 남학생들과 휩쓸려 다닌 적은 결코 없다. 남편 앞에서 입 잘못 놀리면 제명에 못 살줄 알라며 입단속을 단단히 해두고 왔다.) 북한의 김정은이 남침을 못하는 이유가 남한의 중이병 때문이라며 중이병 등쌀에 항복하고 말았다는 전직 중학교 교사. 일찍 남편을 잃고 어렵사리 모자가정을 꾸리며 소외층을 위한 길을 걷고 있다는 현역 사회복지가.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이 책이라던가, 그녀들은 사람살이 신물 난 표정이 역력했으나 여전히 유의미한 것을 찾아 열심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행은 ‘자신의 자리’를 확인 시켜주는 계기가 되곤 한다. 고국을 떠나온 햇수가 늘수록 캄보디아에서 그렇듯이 한국에서도 점점 이방인이 되어간다. 언제부턴가 이곳 프놈펜이 오래된 신발을 신는 듯 한결 속이 편해진다. 프놈펜 공항에 도착해 얼굴 가득 깊은 주름을 만들며 하얀 이를 드러내는 남편을 보니 내 집에 왔구나 싶어지는 게.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