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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이 보는 세상] 말씀 하와이 피스톨
광복(光復) 70주년이란다. 운이 좋아 광복 70주년의 아침을 서울의 핵심 종로, 화장실 합하여 한 평 남짓 되는 쪽방에서 맞이하였다. 요즘 방송과 광고에서 어여쁜 연예인들이 “당신의 광복은?” 하고 묻는데 평범한 한국인들에게 광복이란 어떤 의미인 것일까.
밑도 끝도 없이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대유행이다. 그런데 무작정 통일을 내세우다 보면 북의 논리에 말리는 수가 생길 수 있다. 자칫하면 종북(從北) 세력으로 몰리게도 되고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경건(敬虔)한 시절 분위기 타고 영화 ‘암살’을 정성 들여 보았다. 주인공 하나인 하와이 피스톨은 다음 같은 말씀을 남겨 나를 감동시켰다. “동포끼리 돕고 삽시다.” 동포라는 단어의 질감이 심장 안으로 들어와 그대는 한민족 위해 무엇을 하려는가 조용히 물었다.
배후에 대일본이 있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 않는 강인국은 친일파의 거두이다. 그러나 정말 죽을지도 모를 절박한 위기 상황에 처하자 그는 딸에게 변명한다. 너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 길이었다면서 자신 행동을 변호하고 목숨을 구걸한다. 하지만 그게 새빨간 거짓말인 것은 비는 척하면서 여식(女息)의 여린 효심(孝心)을 흔드는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총을 들어 자신의 자식까지를 재빨리 쏘려는 태도에서 명백하게 판명된다.
설경구가 분한 영화 ‘실미도’의 684부대 제3조장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절규하며 안성기가 연기한 기득권 세력 인물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그 총알들에 얹힌 오열(嗚咽)은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들 가슴에 담긴 동감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천만 관객을 돌파한다는 것은 공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암살’ 또한 일제강점기를 배경한 영화들이 흥행하지 못했던 전례를 깨고 관객 천만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그러니까 친일파들은 현실 기득권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안위라는 이기적 목적에서 일본에 협조한 것이다. 그래놓고도 민족을 위해서 누군가는 해야 했을 더러운 일을 자기가 한 것이라 떳떳하게 주장하며 비열한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나서게 마련인 독립운동을 그저 두면 될 터인데 어째서 그리도 악랄(惡辣)하게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강남의 서점 앞을 지나는데 큰 빌딩을 온전히 가로 질러 설치된 대형 간판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대문짝만한 크기로 묻는다. 숲이 되어 어우러지려면 하나의 나무 각자가 숲사회의 공익을 위해 죄를 짓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지나간 죄는 현재와 무관하니 잊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숲의 바른 기운을 어떻게 다시 복구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내가 생각하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회복이란 이제 와서 친일파를 처단하자는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 후 화해하고 용서하자는 것이다. 반성하여 달라진 나무라야 숲을 해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 사회 비로소 아름다운 숲으로 거듭 나지 않겠는가.
영화 속에서는 친일하는 부친들을 부끄러워하는 청춘들이 살부회를 조직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차마 육신의 아버지를 쏠 수는 없으니 서로의 부친을 살해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어차피 인륜은 거슬러야 하는 것, 그 패륜(悖倫)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자해의 길을 걷거나 청부살인으로 삶을 갉아먹는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하와이 피스톨 자신이 그 구성원의 하나였음을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에게 고백하면서 드러난 에피소드이다.
그 후손들과 같은 올곧은 정기(精氣)가 흩어져 사라져가는 민족의 대종(大宗)이 되어야 한다. 보통 자신들이 사회를 지키는 보수라고 자처하면서 70년 지난 과거의 기억들일랑 잊는 게 좋다 꼬드기는 세력들이 있는데 그것은 달콤한 생각의 함정이다. 부언컨대 악감정으로 처단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반성하는 자 용서하고, 그를 통해 하나가 되어 명실상부한 빛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쯤은 되어야 비로소 ‘광복’이란 말을 쓸 터수가 생긴다.
영화 ‘암살’의 의상을 담당했던 분은 지난 시대 배경 영화들에서 ‘반성’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 게 참으로 이상하다고 했다. 해방 공간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쥐 오줌만한 성과도 없이 해체된 것이 중요 요인의 하나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예술을 통해 간접 처벌할 수도 있었건만 그 여성분의 지적처럼 영화나 문학 등에서 그런 캐릭터들이 활발히 형상화되지 않은 점은 보통의 한국인들인 작가나 독자들 모두 반성해 보아야 할 듯하다.
이정재가 혼신 다해 변신한 밀정 염석진은 바로 그 해방 공간을 수놓은 노덕술과 닮았다는 어떤 분의 지적을 들었다. 노덕술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 정도의 수고면 가능하므로 독자들 각자가 좀더 공부해주시길 바란다. 다만 지독한 친일 부류(部類) 노덕술들은 명대로 살았고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조국에서조차 고통 속에 죽어갔으며 후손까지도 가난과 차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싶다. 그런 후손들에게 광복은 빛의 회복이 아니라 어둠의 재림[再暗]이었으니 그 깊은 절망감을 짐작하기 어렵다. 한 줌 친일의 나무들과 거룩한 독립운동의 나무들 사이에서 보통의 당신과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옳은가. 이제야말로 현실론 운운하며 친일세력을 두둔하는 일을 멈춰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에서 염석진은 안옥윤과 후배에게 ‘암살’로 처단되었지만 현실의 염석진은 대대손손 부와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누릴 만큼 누렸다면, 그들 집안에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 가진 이들 있지 않을까 싶다. 살부회 조직은 바라지 않지만 그 미안함을 씻기 위한 ‘반성’은 나와야 한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반성하고 사과한다며 유감 들먹이는 일본 총리의 화법 흉내내선 안 된다. 사과 빙자해 자신 행동 미화하는 그런 거 닮는 거야말로 명백한 친일의 증좌이다. 오직 ‘재발 방지’할 마음 담은 진솔한 사과가 절실한 시점이다.
빛의 회복 70년이라면 동시에 국토의 허리 잘린 것도 70년이 된 셈이다. 대개의 한국인이 그러하듯 나도 통일을 원하는데 이유는 상당히 단순하다. 곳간에서 인심 나고 집이 좀 커져야 활달한 기상(氣像)이 생기듯 돕고 사는 여유를 가지려면 같은 민족의 한반도가 하나 되는 게 좋겠다 생각한다. 내가 가진 꿈의 하나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유럽까지 달리는 것이다. 유레일 패스를 서울서 끊을 수 있다는 상상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다.
돌아온 프놈펜에서 모두(冒頭)의 질문에 답하자면 나에게 광복이란 ‘인문학 공부’이다. 요컨대 많은 이들이 ‘암살’ 같은 영화를 공부한 다음 반성할 자 반성하여 피해본 분들이 해원(解寃) 용서하고 소수인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다수인 침묵의 국민들 함께 화해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한 목적이며 진정한 광복이란 것이다. 내가 읽기 팍팍한 이런 글 쓰고 있는 것도 그런 점 일깨우고 함께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 내면에는 누구에게나 정의와 이타에 대한 욕구가 있다. 최근에 ‘정의로움’을 주제로 한 ‘명량’이나 ‘암살’ 등이 연달아 천만 넘는 국민을 영상 앞에 앉도록 하는 게 그 증거이다. 친일파들조차 자신들 행적을 항일로 조작하려는 시도들을 보면 정의 이타 욕구는 우리들 근방에 분명 존재한다. 단지 내면 이기심이 공익(公益)의 욕구를 이긴 자들이 득세하였을 뿐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양쪽 길의 가능성이 있기에 인문학 공부는 더욱 중요한 것이며 늦게라도 공부하여 인간(人間)의 길 더불어 걷자고 호소(呼訴)하고 싶을 뿐이다.
목침 지뢰로 촉발된 남북 경색이 암굴(暗窟)로 접어들기 직전 ‘광복’한 건 정말 다행이다./글 : 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