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 칼럼] 라면

기사입력 : 2015년 0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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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이 거칠어지고, 입술이 반쯤 벌어지면서 신음이 새어나오고, 귓불까지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제군 혹시 뭔지 짐작이 가나?” 대학시절 근엄한 교수님께서 오후 첫 강의시간에 던진 질문이었다. 느른한 오후 어수선했던 강의실 분위기가 일순간에 제압되었는데, “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새로 출시된 신라면이 쇼킹한 매운맛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때였다. 라면에 대한 야(?)한 기억이 또 있다. 만사가 귀찮아지는 토요일엔 라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들에게 인심 쓰는 척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모름지기 라면은 냄비 채 놓고 경쟁하듯 먹어야 제 맛. 두 녀석 다 하얀 교복차림이었고 남편 또한 흰 러닝셔츠 바람이었다. 젓가락 전쟁을 하다보면 새빨간 국물이 새하얀 옷에 튈 게 빤한 상황. 잔머리 구단 주부의 꼼수가 발동해, “윗도리 벗어!”를 외쳤다. 이중섭 화가의 그림 <가족>처럼, 여름 날 하오에 토플리스의 네 식구가 신나게 면발을 휘날려 가며 포식했다. (상상은 자유지만, 눈 버리실 거예요.)

라면은 1958년 대만계 일본기업가 안도 모모후쿠에 의해 ‘닛싱 치킨 라멘’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상품화 되었다. 독특한 맛, 저렴한 가격, 간편한 조리법을 내세워 시장을 넓혀 나갔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 10원짜리 삼양라면으로 첫선을 보였다. 세계라면협회(WINA)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연간 1천억 개의 라면이 소비된다. 쌀과 빵에 이어 인류의 식량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14년 한국라면이 출시 50년 만에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시장 1위를 점유했다. 국민 1인당 라면 섭취량 또한 74.1개로 집계돼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평균으로 따지면 닷새에 한 끼에 해당되지만, 실제 라면 애호 연령대의 소비패턴을 가늠해보면 한창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축에서는 훨씬 자주 먹을 터이다. 이렇듯 라면은 삶의 최전방에서 구호식량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의 마트에서도 우리 라면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식품업계가 파악한 바로는 나라별로 한국 라면을 먹는 방법이 다르다. 러시아인은 도시락 라면에 마요네즈를 풀어먹고, 홍콩인은 치즈를 넣어먹고, 세네갈에서는 매운 컵라면을 즐긴다. 캄보디아에선 한국라면 1봉지 값이 현지 쌀 2킬로 가격에 버금가 서민 먹거리가 아닌지라 그 취향을 알 길이 없다. 남은 스프를 열대과일에 찍어먹는 걸로 보아 한국라면 스프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맛있는 라면은 군대를 갓 제대한 예비역이 끓이는 라면이 아닐까. 포장지의 조리법을 정확히 준수해 빨리 끓여 빨리 먹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라면의 미비한 영양을 보충해볼 요량으로 별짓 다해보았지만, 역시 제 레시피가 적격이다. 시간과 공을 들일 수 없을 때 먹는 ‘즉석식품’이라는 라면 본연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우리나라 라면이 장수하여 세계를 석권한 이유로 ‘꾸준한 변신’을 꼽는다. 그만큼 오랜 기간 소비자의 입맛을 추적하여 개량을 거듭해온 탓이다. 무릇 오래 사랑받는 것들이 그렇듯이. / 나 순(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