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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능력시험
유신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우리는 ‘사지선다(四枝選多)’세대다. 네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때로는 찍는) 방식이 아니면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 힘든 사고구조에 길들여졌다. 당시 혼기를 놓친 노처녀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남편감도 사지선다로 고르라면 잘 고를 수 있을 텐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대부분의 시험제도는 사고의 정형화를 유도하게 마련이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 녀석은 한글을 채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제도권 시험을 치르게 되었을 때 일이다. 어떤 과목인지 생각이 안 나지만 정답이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진다>쯤 되는 문제가 있었다. 한글 표현이 서툴러서였는지 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는 모양을 그림으로 묘사해 오답처분을 받아왔다. “답을 꼭 글로 써야 돼?”, 억울하다는 표정의 녀석 태도가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시험 룰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는 그림 답안도 인정해줄 수 있겠다 싶어 아들 편을 들어줬던 적이 있다. 전 국민이 숨죽이는 가운데 2015년 수능 시험이 치러졌다. 이번 시험의 생활윤리 과목에, 스포츠 경기에서 1위를 달리던 상대 선수가 넘어지자 다시 레이스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준 선수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지문으로 제시하며 스포츠 정신과 윤리에 관해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만족을 모르는 경쟁심이야말로 인류의 큰 악덕 중 하나지만, 호승지심과 우연의 변수가 빚는 묘미를 즐기는 맛에 스포츠 경기를 보는 나로서는 정답을 맞출 자신이 없다. 아무리 스타급 선수들이라도 월드컵 경기에서 서로 우애를 발휘해 한 편이 골을 넣으면 다른 편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식으로 플레이를 펼친다면 과연 관중이 얼마나 몰려들 것인가 말이다.
경쟁사회에서 ‘시험’은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지만, 사람의 진면목을 평가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다. 기억력을 필두로 분석력, 변별력이 뛰어난 사람이 시험에 유리하긴 하나, 창조력, 예지력, 친화력, 유머감각 등을 가늠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억력이란 회의(懷疑)하지 않는 경우에나 잘 발휘되는 것이다.”며 시험달인에게 인간적인 통찰력이 결핍될 수 있음을 피력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신동의 인생이 평범하거나 그에 못 미치는 경우도 흔하고,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사람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 사례 또한 넘치게 많다. 세상살이가 몇 가지 지표로 예단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게서 천재적인 구석이 엿보인다. 저마다 예사롭지 않은 세월을 건너오면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터득한 삶의 밑천일 터이다. 길게 보자면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란 한정적인 평가인 <수학능력>보다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행복능력>이 아니겠나 싶다. 그러니 수험생 여러분, 시험 잘 봤다고 으스대지도 말고 시험 망쳤다고 기죽지도 마시라. / 나 순 (건축사, 메종루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