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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우칼럼] 시아누크의 역사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다. 그래서 왕은 국가수반이다. 관공서 안에는 물론 프놈펜 시내 곳곳에는 현재의 국왕인 시아모니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국왕의 사진과 함께 전왕인 시아누크와 부인(현왕의 모친)의 사진이 국왕 사진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시아누크와 그의 부인의 생일이 캄보디아의 국경일로 지정돼 있기도 한다. 왕권은 아들 시아모니에게 물려 줬지만 아직도 사아누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캄보디아의 근세사는 한 마디로 시아누크의 역사였다. 18세에 왕에 오른 시아누크는 60여 년간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정치 지도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왔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 주변국들의 이해관계, 국내의권력 다툼과 내분 속에서 온갖 풍상으로 얼룩진 캄보디아 근세사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필요에 따라 국왕의 자리를 오르내리면서 그는 종횡무진 권력을 행사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 노선을, 내부적으로는 온건 정책을 표방했지만 처한 환경에 따라 변모를 거듭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그의 정치를 줄타기 전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아누크의 불운의 역사는 그가 왕에 즉위하기 전부터 예약되어 있었다. 프랑스 보호국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같은 보호국이었던 베트남 통치에 주력하고 캄보디아는 주변국의 완충 지대로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비교할 때 근대화 작업에서 소외되었고 지원과 개발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관공서의 주요 관리를 훈련된 베트남인들을 기용함으로써 민족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도처에서 불만 세력을 잉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시아누크는 식민 지배에 맞서 프랑스와 대결하지만 점차 거세지는 서구 열강들의 인도차이나 침탈 정책에 직면하면서 독립 의지가 꺾이게 된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가 끝남으로써 비로소 캄보디아는 1955년 80여년의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약소국의 왕에 불과했다.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그것이 곧 장차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내분의 씨앗이 된다. 신성한 존재로서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왕으로 머무르려 하기보다는 왕권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가지려 했던 시아누크의 야망이 결국은 국내에서 세력 다툼을 키움으로써 국가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이나 세력에게 시아누크는 가혹한 응징을 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밀경찰에 살해되고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의 눈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반정부, 반 시아누크 지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된다. 6,70년대 시아누크가 가장 경계하고 응징하려 했던 것이 공산주의다. 중국 공산 정권과 북부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이 캄보디아에서 점점 입지를 넓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색출 작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단되지만 1970년대 초에는 변방을 중심으로 이미 국토의 절반 정도가 공산주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지경에 이른다. 베트남 전쟁 때에는 중립 노선을 표방했다. 그러나 변방이 북부 베트남과 베트콩의 안마당과 같은 처지가 되기도 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폴포트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자신이 발탁한 론놀에 의한 권력 축출과 해외 망명, 철천지원수 폴포트와의 연합과 그에 의한 왕족의 살육 등 시아누크의 일생은 비극 그 자체였다. 불과 3년 돈안 국민의 5분지 1이 죽음을 당한 세기의 비극 ‘킬링필드’의 역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시아누크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선대왕의 이름을 딴 모니봉 대로변 한 모퉁이, 최빈국 국민의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아누크의 대형 사진이 오늘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