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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아들은 왕족이다. 제왕절개로 탄생했으니. “어젯밤 꽤 달렸나본데?” “아직 술이 덜 깨서 아무래도 음주시술이 될 것 같아” 수술대에 오른 날 아침 개복을 목전에 둔 산모는 아랑곳없이 수술진의 농담은 그칠 줄 몰랐다. ‘음주시술’이란 말에 언젠가 신문에서 본 것처럼 가위를 몸속에 둔 채 꿰매버리면 어쩌나, 마취로 의식을 놓기까지 방정맞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고위험도의 일이라도 수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루틴한 일상으로 변해버리기 십상이다.
전문가 기질이 몸에 밴 사람은 매사 사려 깊게 행동할뿐더러 상황에 따라 스스로 매뉴얼을 만들어 가는 데 능숙하다. 이탈리아의 한 일류 요리사는 언제 먹어도 한결같은 맛의 일품요리로 유명하다. 매번 다르게 요리하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맛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그의 노하우다. 그날 시장형편에 따라 식재료 상태는 달라지게 마련, 그때그때 요리 전반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토마토가 신맛이 강하면 식초를 덜 치고 향신료가 신선하지 않을 때는 다른 식품으로 조절하는 식이다. 오랫동안 중소기업 대출업무를 순탄하게 이끌어온 우리나라 모 은행가는 나름대로 쌓은 노하우를 메모해 두고 참고한다. <거래업체 사장실을 직접 찾아가 본다. 평수가 넓고 호화스러운 사장실이 있는 업체는 주의한다. 사장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본다. 주소이전이 잦으면 업체도 사장을 닮아 안정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직업이 됐든 건실한 조직일수록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열심히 꾸려가는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세월호’ 침몰사고가 전 세계인의 누선을 건드렸다. 눈앞에서 생으로 수장되어 가는데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 온 자식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부모의 영상 앞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무리한 증축으로 구조적 결함을 부른 선사, 승객보다 먼저 탈출한 선장, 시종일관 무능을 드러내는 당국, 최소한의 게이트키핑도 없는 자극적인 보도로 타인의 비극 팔아먹기에 급급한 기자…, ‘생명존중’과 ‘자기직분’이라는 기본중의 기본덕목을 저토록 속속들이 저버린 사회가 있다니, 전 세계적인 비웃음 또한 샀다.
첨단기기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은 안전사고에 있어서 누구나 피해자도 될 수 있고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사고의 대부분은 우리 능력 부족보다 ‘설마 나에게…’라며 넘어가곤 하는 집중력 부족에 있기 때문이다. 재난대응 매뉴얼과 시스템 혁신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지만, 우리가 끝내 기댈 수 있는 방책이란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일이라는 평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이 지독한 슬픔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는 길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에 몰입하는 것뿐이리라. 그럼에도, 여객기 탑승객이 승선권으로, 놀이동산의 어린것들이 입장권으로, 식당 손님이 주문수로, 뉴스 독자들이 조회수로, 지역 유권자가 표밭으로…, 사람이 머릿수로 계산되는 곳이라면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기대하기 힘들 터이다.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