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칼럼] 12월의 바람

기사입력 : 2013년 12월 24일

바람

캄보디아 무는 유난히 맵다. 이 독한 무로 감쪽같이 달랑무김치를 담근 지인의 솜씨에 탄복하여 따라해 보기로 했다. 뭉툭하니 짤막한 한국 달랑무와 달리 덜 자란 단무지 무처럼 생겨 늘 깍두기만 담가먹었다. 무청 채 반으로 갈라 달랑무로 위장시키는데, 알싸한 무 내가 코를 찌른다. 다 절여졌다싶어 양파, 마늘 간 것에 쪽파, 고춧가루 온갖 매운 양념을 끼얹으니 급기야 눈물이 핑 돈다. 제법 고국의 달랑무 때깔이 나자 타국살이 나가 홀로 세모를 맞을 아들 생각이 났다. 어적어적 맛있게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한 것이. 물꼬를 튼 눈물 탓일까, 난데없이 가슴께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싶다. 베란다로 나가 건조대의 수건을 뺨에 댔다. 드세진 마른 바람에 타월이 살을 긁힐 만큼 까슬하다. 세상 모든 물기를 빨아들일 태세다. 어느덧 건기, 12월마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12월의 바람은 준엄한 경고라도 몰고 오듯, 마음을 속속들이 헤집어 놓으며 애써 모른 체했던 것들과 마주하게 한다. 아등바등 제 앞가림 한답시고 저버렸던 도리(道理), 세월의 더께가 앉은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빳빳한 성정 다 무뎌지고 신선이 되어 가신다는 부친, ‘이제 할 말 하고 살련다.’ 투정이 느셨다는 모친, 한갓지게 무릎을 마주했던 기억이 까마득하다. 내년이면 몇이신지 이제 연세도 가물가물하여, ‘지금도 너무 늦은 때’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기요메”라는 우편 항공기 조종사가 있었다.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던 중에 추락한다. 넘어지면 얼음덩이로 변해버릴 영하 40도, 고도 7천 미터의 험준한 산맥을 걸어서 탈출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걷기를 나흘 밤, 동상으로 발과 무릎과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고꾸라진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고동도 점점 약해져 황소처럼 끌고 가야할 삶의 짐을 그만 내려놓고 싶은 순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 있었다. ‘내가 죽더라도 보험증서가 아내를 궁핍에서 구해 주겠지. 그러나 그 보험은 실종 처리되면 4년 후로 연기된다. 여기서 죽으면 흔적 없이 안데스의 늪으로 흘러들고 말 것이다. 저 앞 높은 바위에 내 몸을 기대두면 올 여름엔 날 찾을 수 있겠지.’ 그는 아내의 보험증서 때문에 다시 일어난다. 사람들 눈에 띌만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구조된다. 기요메는 생텍쥐페리의 친구로 <인간의 대지>에 소개된 실화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고 알랑드 보통은 말한다. 기요메의 실종은 좀 더 극적인 경우지만, 한 해 한 해 세상의 벽은 높아만 가고, 직장, 주거, 교육, 부양…, 집안 걱정에 매몰되어가는 이 땅의 어버이들 삶과 다를 바 없다. 가족이란 사랑보다 더한 것, 일테면, 생식, 보살핌, 공동의 기억,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같은 운명과 닿아있다. 올해도 가족이 있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