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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순칼럼] 네 자신의 사랑
오래 전에 마키아벨리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5세기에 피렌체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마키아벨리가 외국 순방 길에 고위층 관저를 방문한다. 집안에 인기척이라곤 없는데 후미진 방의 어둑한 곳에 한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있다. 여인의 옷자락이 스쳐간 게 언제던가, 장기간의 외유로 지쳤던 심신에 생기가 솟는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어둠속의 여인은 거짓말처럼 안겨오고, 작은 새처럼 떠는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극치감을 느낀다.(남자 배우의 표정이 그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실내 빛에 익숙해져 주변이 선명해진다. 의관을 정제하고 여인을 돌아다보니, 언제 감았는지 철사 줄 같은 머리카락에 눈, 코, 입가에 곱이 그렁그렁하고,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타고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누더기 차림의 노파가 겁에 질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실제보다 과장된 자극에 끌리는 현상을 초정상 자극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현실을 한껏 부풀려 포장한 초정상 자극으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특히 성적 코드는 더하다. 거리의 광고판, 케이블 TV,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의 난잡한 영상물 도배로 “성(性)”이 무슨 장난처럼 취급되는 시대다. 음란물 시장이 큰 사회일수록 부부간에 소원해진다는 흥미로운 보고도 있다. 안방을 점령한 매력적인 연예인, 감각적인 러브스토리, 상술로 왜곡된 성생활 보도 등에 현혹되어, ‘나만 왜 이렇게 살지?’ 자신만의 사랑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라는 드라마가 화제라고 한다. 결혼 17년차 권태기로 접어든 두 쌍의 부부가 이웃으로 살게 되면서 네 남녀가 엇갈리게 끌리는 로맨스를 그려나간다. 다른 여자들을 볼 때나 성인물을 접할 때는 건강하게 흥분되지만 아내 앞에서만 위축되는 “마누라성 발기부전” 같은 거침없는 대사로 공감을 얻고 있는 모양이다. 발기부전 원인으로 스트레스, 공포, 분노를 비롯해 윤리적 문제를 꼽는다. 이웃집 여자를 넘볼 때 적용되어야 할 “윤리적 문제”가 오랜 세월 동고동락으로 친근해진 아내에게 근친상간이라도 하는 듯 발동된다니,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부부의 연을 크로스로 바꿔 맺는다 해도 병이 치료될 성 싶지는 않다. 마누라는 어쨌거나 마누라니.
장 보드리야르는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은 죽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예술이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다.”고 말한다. 혹자는 사랑 또한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관음증을 부추기는 말초적 사랑의 홍수 속에 애련과 인고의 자리가 있는 원숙한 사랑을 놓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긴 해도 마키아벨리는 노파를 품었던 그날, 타는 듯한 갈증으로 잠결에 깨어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달게 마신 뒤 당나라 유학을 작파한 원효대사와 같은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 ‘결핍’이야말로 최대 ‘충족’의 조건이고, 행복도 불행도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 나순 (건축사, http://blog.naver.com/naarch)